(21) [사역자설교]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 누가복음 15:25-32 - 이상진 목사 | 2025.03.16 - YouTube
네, 안녕하세요. 1번타자 이상진 목사입니다. 1번타자의 덕목이 그 빠른 발일 텐데, 그러면 체중이 많이 나가면 안 되잖아요. 제가 일주일 사이에 한 5km 정도 빠진 것 같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셔요. 이제 양육의 시기가 찾아왔습니다.
양육 때마다 우리 담임 목사님의 돌탕, 집탕 설교를 많이 들으시고, 또 이제 과제를 하실 텐데요, 저도 오늘 말씀 준비하면서 여러 번 그 설교 말씀을 다시 들어봤는데, 제가 얼마나 집탕이면서 또 돌탕인지 다시금 보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은 집에 있는 탕자, 그 부분에 속합니다. 집 나갔던 둘째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기뻐하는데, 맏아들은 분노를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한지 알지 못하니, 함께 있어도 그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죠. 우리도 내 생각이 상대방의 생각과 다르면 거리를 두게 됩니다. 내가 무시당하고 거절당하는 것 같아서 분노하지요. 그래서 상대방의 마음을 알고, 또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무척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함께 묵상하면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 또 하나님과 함께 있는 우리에 대해서 함께 나눠보겠습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첫째로 거부해도 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25절에서 28절입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으매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맏아들이 밭에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성실하게 일을 하고 집에 들어가고 있는데, 집 근처에 왔을 때 풍악 소리, 춤추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마 의아했을 것이에요.
"무슨 우리 집에 좋은 일이 있을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는데, 동생은 집을 나가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나는 열심히 일하면서 아버지를 섬기고 있는데." 아버지는 좋은 소리 한번 해주시는 분이 아니신데, 뭐가 좋아서 잔치소리가 들리지 의아 했겠죠. 한 종을 불러서 무슨 일인지 그, "당신의 동생이 건강하게 돌아왔고, 그래서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으며, 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첫째 아들은, "둘째 아들이 건강하게 돌아왔다는 그것이 뭐가 그리 기쁘다고 잔치까지 열어 주느냐?" 하는 생각이죠.
아무리 좋게 얘기해도, 따뜻한 밥 함께 먹이고 하루 이틀 좀 쉬게 하다가 다시 자기와 함께 밭으로 보내는 게 맞는 생각 같은데, 살찐 송아지 잡고 대대적인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고 너무 못마땅합니다. 나만 열심히 일했네 하는 생색과 피해 의식으로 분노하여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내 생각이 강하고 나만 옳다 하는 생각이 강하면, 그 누가 얘기를 해도 듣지를 않지요. 거절하기 일수입니다. 맞아들은 자기 동생인 작은 아들의 복귀를 기뻐하는 이 잔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잔치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상주심과 또 징벌까지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가 다 옳고 나만 열심히 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았고, 자기만 맞다고 여기면서 나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들 된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니, 자기가 들어가서 집안에 들어가서 물어보고 알아보면 될 일을 굳이 집 밖에서 종을 불러다가 묻습니다. 아들이지만 남보다도 못한 사이입니다. 그런 맞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저희 아버지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 오셨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먹는 것에 있어서는 염려와 또 배려가 많으십니다. 제가 밥을 먹고 있는데도 밥을 먹으라고 하시고요, 배가 불러서 소화제를 찾고 있는데도 과자를 권하십니다.이러니 저는 불편합니다. 아들을 향한 배려와 관심인 것은 알겠는데 불편합니다. 아버지도 아마 답답해 하실 거겠죠. 아들에게 이것밖에 해주지 못하니, 내가 사랑을 보여주는 방식이 이것밖에 되지 않으니, 아마 아버지도 답답하셨을 거예요. 그래도 저희 부자는 귀엽기라도 하죠. 오늘 성경에 나오는 이 맏아들은 자기 생각에 갇혀서 꼬일 대로 꼬였습니다. 집에 들어가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집 밖에 서서 분노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거부합니다. 말씀에 대하여 거부하고 공동체에 대하여 거부합니다. 내 생각이 강하면 다른 사람의 의견이 들리지 않습니다. 내 생각이 강하다는 것은 내가 옳다는 것입니다. 나는 의롭고 정직하고 성실하다, 이런 것이죠.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 생각이 강하면 나를 힘들게 하는 배우자를 거부합니다. 자녀가 속을 썩이면 내 탓은 아니라고 합니다. 지나온 삶을 부정하고 새롭게 리셋이라도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죠.
배우자가 힘들어서 이혼으로 거부하고, 또 지치고 힘들어서 쉬고 싶다는 자녀를 학원으로 과외로 보내면서 거부합니다. 조금이라도 내가 손해 보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도대체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분노로 거부합니다. 저도 상한갈대가 되어서 억울한 일 앞에 강하게 거부한 적이 있습니다. 저의 상한갈대였던 적이 있었는데요. 열심히 저는 사역을 했었고, 주변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썼었습니다. 그런 삶을 살다가, 결혼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그런 삶을 이주했습니다.
내가 인정받아야 하는 교회의 일이 늘 우선이었고, 내 명예가 칭찬받고 인정받는 그것이 우선이었습니다.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정보다 밖에서의 일에 더 시간과 에너지를 썼습니다. 교회 일이 먼저고 학교 공부가 먼저였습니다.
그렇게 아무 관심도 없는 것처럼, 상대방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처럼 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건 이렇게 해라, 저건 저렇게 하지 마라" 잔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교회에서는 잇몸이 보이게 웃지 마라, 팔랑팔랑 뛰어다니지 마라, 치마는 좀 길게 입어라, 전도사의 아내다운 체통을 요구했습니다. 길거리를 걸을 때는, 운동화 끈이 풀렸다고 갑자기 이렇게 주저앉아서 운동화 끈을 묶는 거예요. 그러면 "네가 여기서 이러면 주 사람들의 통행에 방해가 되니 저 옆으로 가서 묶어라"고 하면서 면박을 주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 체휼을 해 주지 못했어요.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그건 네가 큐티를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화라도 내고 오지, 뭐 이제 와서 억울해 하느냐, 네가 그렇지, 뭐"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사업으로 힘들어 하시는 장인 어른과 유방암으로 고생하시는 장모님을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 이런 것들은 다 사소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제가 열심히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상대방은 지치고 매말라 가고 있다라는 것을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아내 휴대폰에 한 문자 메시지를 보고서, 아내가 외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분노와 절망감과 배신감으로 아내를 이전보다도 더 달달 볶으면서 코너로 몰았고, 목을 죄였습니다.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열심히 일했는데, 충성되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달려왔는데, 이렇게 억울한 일이 생기다니, 열심히 사역을 했는데 염소 새끼 한 마리는 커녕 외도라니요.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는 모두가 다 제 편이 되어주었습니다. 사역했던 교회에서도, 학교 동기들도 모두가 다 옳고 그름의 세속 가치관만 판단하여 상대방이 나쁜 사람이고 제가 피해자가 맞다라고 하면서 제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억울한 사람은 말이 많아지죠. "내 탓이 아니다, 나만 피해자다, 나만 억울하다." 이러면서 이유를 많이 댑니다. 뭐 때문에 힘들고, 누가 잘못을 했고,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여기저기 말해서 내가 얼마나 억울한지 알리고 내 편을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심지어 저는 노상 판매대 순대 아주머니와 처음 보는 택시 기사님한테까지도 이런 사실을, 내가 얼마나 억울한 사람인지를 알렸습니다. 오뎅이라도 하나 더 줄 줄 알았는데,,, 엘리트들은 오픈하기가 어렵다고 하셨잖아요. 그렇게 하셨던 그 말씀처럼, 정작 제가 여기저기 말하고 그렇게 다녔지만, 정작 믿음의 공동체 내에서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가만히 끊고자 했던 것입니다. 연애 기간 4년, 결혼 기간 4년, 총 8년의 시간을 저와 함께 보낸 여자는 저에게 용서를 구하고 회복을 권했지만, 저는 이혼으로 그를 끊었습니다. 제 인생 가운데 8년의 시간을 그야말로 낭비하게 된 것입니다. 분하고 분하기만 한 긴 시간을 보내며 나에게 닥친 이 사건을 해석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 데 거부했습니다. 저처럼 분노하고 있었던 이 맏아들이 문밖에서 씩씩대고 있을 때 아버지가 다가오십니다. 28절.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데,, 분노하여 집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으려 하는 맏아들에게 다가가서, 같이 기뻐하고 동생의 허물을 덮어주고 같이 잔치에 참여하여서 우리 가족의 관계를 회복하자고 권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집으로 돌아오라고, 나의 기쁨에 함께 하자고 권하십니다. 나에게 일어난 사건이 이해가 되지 않고 해석이 되지 않아 하나님을 거부하고 피하고 숨으려고 하지만, 하나님 말씀으로 사건으로 계속 찾아오셔서 함께 집에 들어가 즐기자고 권하십니다. 이것이 작은 아들 때문일까요? 작은 아들을 위한 잔치가 되었는데 형이 기뻐하지 않으니까 작은 아들이 민망해 할까 봐, 그래서 아버지가 형한테 들어오라고 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자기 생각에 갇혀서 오히려 지옥을 살고 있는 맏아들을 위해서입니다. 맏아들을 위해서 집으로 돌아오라고, 들어오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없고 억울한 일이 발생했을 때 회피하고 원망하고 분노하면서 해결책을 찾지 못해 스스로 지옥을 사는 맞아들에게 아버지는 찾아와서 권하십니다. "얘야, 함께 들어가자. 구원의 집으로 들어가자. 예배 자리로 들어가자." 이 사건이 해석이 되지 않아서 날마다 분노하면서 꿈속에서까지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습니다.
당시 학생이었는데요,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가 없어서 마지막 학기를 휴학을 했습니다. 그리고 동기들은 다 졸업했고, 그 다음 학기에 학교를 복학을 했는데 거기서 권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담임 목사님을 만나뵙게 된 것이죠, 신앙 수련회 그런 곳에 강사로 오셨었는데요, 목사님께서 목사님의 고난을 나누시며 고난 중에서도 말씀 묵상을 놓지 않고, 또 말씀을 통해 삶을 해석하자고 권하셨습니다. 큐티로 살아나신 간증을 들었을 때 구속사가 뭔지도 모르지만, 저분은 진짜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 이후로 계속해서 큐티인 큐티를 해왔고, 사역하는 교회들마다 큐티인으로 나눔을 했습니다. 물론 구속사 말씀이 들리지 않아서 제대로 된 말씀 묵상 큐티를 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날 그 수련회 강사로 오신 우리 목사님이 하나님의 권하심이었습니다. 들어오너라 성경을 묵상하고 함께 나누어보자 상처가 별이 될것이다. 고난이 축복인지, 상처가 별이 되는지, 그는 나보다 옳은지 저는 잘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큐티인 묵상을 하고 사역하는 교회 청년들과 계속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분노에 차서 가정도 버리고, 내 자신도 버리고, 억지로 겨우 학교만 다니면서 하나님의 집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있었던 저에게 하나님은 담임 목사님을 보내셔서 권하셨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게 하셨습니다. "날마다 큐티하는 여자", 오늘 이렇게 들고 와서 이렇게 들어야 되는데 깜빡했습니다. 믿고 싶지 않은 일이 생기고, 인정할 수 없는 일이 생겨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분노에 차서 교회를 떠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혼자만의 동굴로 회피하고, 또 이혼과 자살로 분노를 표합니다. 그래도,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예배를 권하고, 목장을 권하고, 큐티를 권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원망의 사건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참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을 누리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난 제가 이렇게 주일 예배에서 말씀을 전하게 된 것도 저희 가족에게는 하나님께서 권하시는 사건입니다. 오늘 2부때 오실 건데 저희 장모님하고 저희 어머니가 했거든요.
[적용 질문]
이해가 되지 않고 분하고 억울한 사건은 무엇입니까? 그 일을 목장에서 잘 나누고 계십니까? 예배와 목장과 큐티를 통해 하나님께서 권유하고 계심이 느껴지십니까?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둘째로 구원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29절, 30절입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맏아들이 마음이 상해 빈정대면서 하는 말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니, "아버지의 이 아들, 이러면서 이 아들이 돌아온 것으로 살진 송아지를 잡으시다니, 이것은 굉장한 낭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친구들과 함께 즐길 염소새끼 하나 얻지를 못했었는데, 불공평한 처사라고 생각이 됩니다." 네, 맞습니다.
열심히 일한 맏아들에게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고 재산 들고 방탕하게 지내다 다 탕진하고 겨우 몸만 돌아온 둘째 아들에게는 적절한 벌이 주어야지 마땅하지요. 맏아들에게 공로가 있고, 둘째 아들에게는 공로가 없기 때문입니다. 맏아들에게 무슨 공로가 있습니까?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공로, 가정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는 공로, 아버지를 주인으로 섬기며 종처럼 일했고, 그럼에도 염소 새끼 하나 달라고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고 참았던 공로가 있습니다.
자유가 아니라 종으로 섬기면 자기가 한 일이 다 공로가 됩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작은아들의 복귀를 기뻐하며 배설한 잔치는 낭비됩니다. 맞아들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탕자입니다. 탕진하시는 아버지. 지금 아버지는 분명 비효율적이고 경제적이지 않은 일에 낭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이것을 모를 리 없겠죠.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낭비를 합니다. 낭비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왜 이런 낭비를 할까요? 아버지는 왜 손해까지 감수하며 쓸데없는 일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구원 때문입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죽은 자로 여기고 유산을 달라고 했습니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야 받을 수 있는 유산을 요구했어요. 이것은 동네 사람들이 이 작은 아들을 혼내주고, 마치 죽은 사람처럼 취급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죠. 그런데 그는 그렇게 받은 돈을 나가서 다 탕진했습니다. 도박으로, 유흥으로, 어쩌면 투자를 하려다 사기를 당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자기 욕심만 다 채우려고 마구마구 돈을 써 버렸어요.
누가 봐도 불효자고, 문제가 있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곁에 두고 싶지 않은 사람, 두번 다시는 내인생에서 없어졌으면 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같이 있으면 나한테 또 피해를 입힐 사람, 손해를 끼칠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죄인이 돌아옴으로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손해를 끼치고, 빚이 쌓이고, 채무 딱지가 붙고, 신용불량자가 되어도 아들이 돌아온 그것이면 좋다면서 살찐 송아지를 잡습니다. 이런저런 엄청난 피해와 손해를 겪어도 아버지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아들이, 그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바로 그것입니다. 아버지가 싫고 아버지를 무시해서 떠났고, 또 경제적인 피해까지 끼쳤을지라도 아들이 돌아온 것으로 인해 살찐 송아지를 잡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집나간 우리가 다시 돌아와 예배의 자리에 거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아버지가 싫고 무시가 되어 돈만챙겨 먼 곳으로 떠났던 아들이든, 자기 생각이 너무 강해 아버지가 동의 되지 않고 화가나 원망하여 거절한 아들이든 돌아오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아버지 하나님은 그 어떤 손해도 감수할 수 있습니다. 오래도록 기다리시며 우리에게 찾아와 권하시며 시간의 손해를 보십니다.
우리가 거절하면 거절 당했다는 모멸감이 있으시겠지만, 그런 자존심의 손해도 다 감수하십니다. 하나님께는 돈이 필요하진 않지만, 아마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큰 돈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감수하셨던 손해, 피해, 낭비의 절정은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입니다.
세상 권세 아래에서 이기고 이기는 싸움만 하면서 사망으로 달려가는 우리를 위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은혜를 받고 말씀이 들려도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그렇게도 엉망인 우리 죄인을 위해, 우리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목숨을 내주셨습니다. 낭비도 이런 낭비가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구원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는 그 낭비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목숨까지도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낭비를 하시면서 그 죄인이 우리가 돌아왔을 때 살찐 송아지를 잡으시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우리도 이 마음을 품고 전해야 하겠지요. 전처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저는 제 자신이 너무나도 불쌍해서 울었습니다. 자존심이 너무 상했고 배신감에 아팠습니다. 내가 그동안 해준 것이 얼만데 나에게 이런 피해와 손해를 끼치나,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다, 오직 내가 받은 피해에 대해서만 보상받아야 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껏 선택한 것이 이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내어주시며 이루신 가정을 저는 제 자존심 때문에, 제 상처 때문에 파괴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제게 목숨까지도 내어주셨는데 저는 그 은혜를 완전히 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손해 보신 것처럼 우리 교회와 목사님도 저 때문에 손해를 보셨습니다. 저는 이력서나 사역자 면접을 볼 때 제가 이혼한 사실을 굳이 밝히지 않았습니다. 말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고,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혼하면 안 된다, 이게 국시인 교회인데 제가 속이고 들어왔으니 얼마나 교회에서 당황을 하셨겠고, 목사님께서 얼마나 고민이 많으셨을까 생각이 됩니다. 저 아무 생각 없이 이력서를 내고 들어왔지만 분위기를 보니까 이게 아닌 거예요. 그래서 마음에 큰 부담이 늘 있었습니다. 나가야 되나, 이런 생각이 많았지만, 근데 살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말씀 묵상하는 공동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제가 도저히 자유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이기적인 줄도 알고 뻔뻔한 줄도 알았지만 그냥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되고 싶지 않아서 일 열심히 하는 것으로 나름 만회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늘 눌려 있었고, 내가 여기 있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에, 엘리사가 게하시 때문에 통하며 이타적인 기도를 했고, 그로 인해 게하시가 눈이 열려 불말, 불병거를 보게 되었다는 담임 목사님 설교 말씀을 통해서 비로소 말씀이 들렸습니다. 나는 교회에 피해만 입히는 사람인데, 그런 나를 위해서 목사님께서 통해 하시고, 이타적인 기도를 하셨구나, 이것이 깨달아졌습니다. 구원 때문에 이런 손해를 감수하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구속사가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고, 비로소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아니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 오히려 죄인인 저 때문에 우리 목사님과 선배 사역자들과 또 여러분 교회 공동체가 손해를 감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가실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거부했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불을 내려서 저들을 멸해도 될까요, 이렇게 목사님께 여 때 목사님께서 아니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을 꾸짖고 다른 마을로 돌아가시는데, 거기 함께 가신다. 함께 다른 마을로 돌아가셨습니다.
옳고 그름의 가치관으로만 판단하고 해석을 못 하고 있는 저를 한번 꾸짖으시고, 저를 데리고 함께, 그리고 다른 마을로 굳이 돌아가시면서 손해를 감수하셨습니다. 목사님과 공동체의 이 은혜 때문에 제가 오늘도 숨을 쉽니다. 저도 영혼 구원 위해 살찐 송아지 잡는 사역자가 되겠습니다.
[적용 질문]
복음 전해야 할 그 한 사람을 위해 어떤 손해를 감수하겠습니까?
내가 예수 믿게 하기 위해 수고해 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셋째로 아버지의 것을 내 것으로 여기는 것이 사명입니다.
31절, 32절입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예,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내 것이로되, 이 내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의 것이 다 내 것이라고 하세요. 아버지의 것이 다 내 것이라면 여러분 뭐를 제일 먼저 내 것으로 삼고 싶으세요? 돈,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 이런 거 아닐까요? 뼈 빠지게 일만 해온 마아들에게 아버지는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고 하세요. 동생이 흥청망청 써버린 돈도 사실 일부 맞아들의 것이죠, 맞아들의 것이죠. 염소 새끼든 살찐 송아지든 다 맞아들의 것이죠. 집안의 종들도 다 맞아들의 것이죠. 왜냐하면 맞아들은 늘 아버지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에요. "너는 나와 항상 함께 있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고 하시잖아요. 아버지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맞아들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에요. 아버지의 것이 다 맞아들의 것이에요. 그렇다면 아버지의 것이 다 맞아들의 것이라면 맞아들에게 돌아온 동생도 자기 것이에요. 돌아온 동생도 자기 것이어야 해요.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사랑했었던 그 사랑도 맞아들의 것이 되어야 해요. 집 나간 둘째 아들에 대해서 걱정하는 그 걱정하는 마음도 맞아들의 것이 되어야 해요. 아버지가 사랑하는 것, 아버지가 신경 쓰고 있는 것, 아버지가 애통해하는 것, 아버지가 바라고 있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다 맞아들의 것이 되어야 해요. 하나님께서 마땅하고 마땅하다고 여기는 것을 똑같이 마땅하게 여기는 바로 그것이 맞아들의 것입니다. 이 탕자의 비유가 속한 누가복음 15장은 잃어버린 한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애통함과 그 영혼이 돌아왔을 때 기쁨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세요.
여러분은 어떤 잃어버린 한 영혼이 있습니까? 그 영혼에 대한 애통함이 있으신가요? 혹시 잃어버리고 싶은 영혼이 있지는 않으신가요? 누군가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잃어버린 영혼이 돌아오는 것에 있습니다. 그가 돌아옴으로 인해 모두가 함께 기뻐하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 가정이 무시가 되고 나를 힘들게 하고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그런 사람이 있어서 힘든 가정이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정의 회복을 원하십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를 기뻐하시는데, 이것은 하나님께 마땅한 일입니다. 외도한 배우자로인해 이혼이하고 싶어도 그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것이면 됐다라고 하면서 기뻐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여기에는 나의 상처, 나의 생색, 내 주장이 있을 수가 없어요. 나에게 어떤 손해를 끼치고 피해를 입혔던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낮고 겸손하게 돌아왔는데 그 사람한테 무슨 복수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그, 아무리 흉악한 죄를 저지른 사람이어도,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사람이어도, 저쪽 출신 사람이어도 그가 자기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한다면 우리는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정말 사람 힘들게 하는 배우자와 함께 살고 계십니까? 그 사람과 이혼하는 것만이 내 인생이 천국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신가요? 그 어떤 것도 이혼의 사유가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외도한 배우자라고 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사람의 방법으로, 사람의 이유로 나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혼을 해보니까, 외도를 당해보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서 집 밖에서 분노해 보니까,인생은 리셋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인생은 리셋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인생은 리셋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살아왔었던 그 시간이 오히려 지옥이었고, 이혼을 하나마나 이것은 다 똑같았습니다. 제가 힘들다, 제 신상과 관련해서 힘들다, 이런 것만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내 영혼이 이혼으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고, 그 사실을 내 체면과 교양 때문에 공동체에 제대로 나누지도 못하니 살아 있어도 죽은 것 같은 지옥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다 상한갈대이고 다 지옥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아무도 편할 수가 없어요. 내게 보내주신 사람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했어야 하는데, 말씀이 없으니 인본적인 사랑만 하게 되고 이기적이고 생색을 내게 됩니다.
이건 사랑이 아니라 거래죠. 내가 이만큼 널 사랑해 줬으니 너도 그만큼은 나한테 부합해 줘야 한다, 이건 사랑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사랑에 대한 이런 잘못된 인식이 나의 배우자를 외롭게 하고 자녀를 지치게 합니다. 사랑은 거절당해도 계속 찾아가 권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내가 손해가 생기는 것을 개의치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 생명까지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사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나를 거절하는 사람에게 찾아가 끊임없이 권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피해를 보면서까지 그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 누가 이런 사랑을 할 수 있겠어요?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이런 사랑을 만들 수도 없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합니다.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엄청나게 흉악한 이 죄인을 굳이 당신의 목숨까지도 내어주시며 사랑하신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를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인간적으로 하는 사랑이 결혼을 유지해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정에 있어야 이혼이 막아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가정이 살아납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 가정이 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 가정이 이혼할 것 같은 그 위기를 겪고 있어도 이 가정이 회복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나도 내 가정이 회복되는 것을 원하면서 적용해야 합니다.
내 자녀가, 내 가정이기를 포기하면서 돌아설 것이 아니라 회복되도록 해야 합니다. 내 자녀가 나를 너무 힘들게 하고, 귀찮게 하고, 내 명예를 깎아 먹으면서 있다 할지라도 그가 살아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나도, 부모된 나도 내 자녀가 살아나는 것을 원해야 합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나의 것으로 삼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가정은 구원을 위해, 거룩을 위해 창조된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렇다면 이혼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에게 정면으로 대항하는 최대의 악행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가정을 꼭 지켜 주십시오. 자녀에게 깨끗한 호적을 물려 주세요. 싸우더라도 목장에 꼭 나가세요. 이것이 우리를 남편으로, 아내로 부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사명입니다.
[적용 질문]
가정을 지키는 것이 사명임이 인정됩니까? 그렇다면 나를 힘들게 하는 배우자, 자녀, 부모에게 어떤 화해와 용서의 말을 하시겠습니까?
네, 말씀 맺겠습니다.
나와 항상 함께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거절해도 곧 다가와서 권하십니다. "들어가자, 네가 거절해도 상관없다, 들어가자, 함께 회복하자."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거절함으로 인하여서 마음에 상처가 되시겠죠. 손해와 피해를 입으시겠다고, 그럼에도 살찐 송아지, 예수그리스도를 내어 주십니다.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십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아버지의 것이 내 것이라 하셨어요. 가정을 지키는 것이 우리 모두의 사명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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